위,촉,오

보즐 - 오나라의 정치가

꿀로그 2015. 11. 17. 10:30

보즐(步騭, ? ~ [247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 [오 (삼국)|동오]의 정치가로, [자 (이름)|자]는 '자산'(子山)이며 서주 임회군 동성현 사람이다.

 

 

 

== 사적 ==
[삼국지] 권52에 열전이 있다.

난세를 피해 강동으로 가, 광릉 사람 [위정](衛旌)과 함께 낮에는 오이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밤에는 공부했다. 살던 곳이 군의 호족 회계 사람 초정강(焦征羌, 《오록》에 따르면, 이름은 초교(焦矯)며, 옛날 정강령이었다)의 땅으로, 그를 두려워하여 [위정]과 같이 오이를 헌상하러 방문했다. 초정강은 보즐 일행을 심히 멸시했으므로 [위정]은 심히 치욕을 느끼고 분노했으나, 보즐은 초정강의 멸시를 묵묵히 받아내었다. [위정]이 보즐에게 분노하자, 보즐은 대답하여 애당초 우리가 빈천하니 빈천한 대로 대우받았을 뿐인데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냐 하였다.

[손권](孫權)이 토로장군이 되자 불러 주기로 임명했다. 해가 지나자 질병으로 관직을 면하고 [제갈근](諸葛瑾), [엄준](嚴畯)과 함께 오중에서 유학하며 명성을 얻었다.위요 찬, 《오서》 [손권]은 보즐에게 해염장을 제수하고, 다시 불러 거기장군 동조연으로 삼았다. [[손권]]이 서주목이 되자 보즐로 치중종사를 삼고, 무재로 천거했다.

[건안] 15년([210년]), 파양태수가 되었고, 교주자사·입무중랑장으로 전임되어 무야리 천여 명을 거느렸다. 이듬해 사지절·정남중랑장이 더해졌다. 당시 교주에는 유표가 임명한 창오태수 오거와 후한의 교지태수로 형제들과 함께 교주에서도 현재의 북베트남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사섭](士燮)이 할거하고 있었다. 오거는 겉으로는 보즐을 따르면서 속으로는 거슬렀다. 보즐은 우호를 가장하여 오거를 회유하여 서로 만났고, 그 자리에서 오거를 베어 위세를 떨쳤다. 한편 [사섭]도 형제들을 이끌고 보즐에게 귀순하여, 교주는 오나라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익주군의 호족 [옹개](雍闓) 등이 태수 정앙(正昂)을 살해하고 오나라에 귀부하기를 구하자, 보즐은 이들을 받아들여 평융장군이 더해지고, 광신후에 봉해졌다.

[연강] 원년[220년], [손권]의 명령으로 여대가 보즐을 대신했다. 보즐은 교주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장사로 갔으며, 마침 [유비](劉備)가 쳐들어와 무릉만이가 준동하였으므로 [손권]의 명령에 따라 익양에 주둔했다. [유비]가 패배한 후 영릉과 계양 각지에서 일어난 소요를 곳곳마다 진압했다. [황무] 2년[223년), 우장군·좌도호로 승진하고 임상후로 봉해졌다. 동 5년(226년), 가절을 받고 구구로 주둔지를 옮겼다.

[황룡 (오)|황룡]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표기장군이 되었고 기주목을 겸임했다. 같은 해에 서릉을 도독하고, [[육손]](陸遜)을 대신하여 국경을 진무했다. 촉한과 맺은 동맹 조약에 따르면 기주는 촉한의 영토가 되므로, 기주목에서 해임되었다. 교사 여일이 횡포를 부려 수많은 사람이 잡혀가자,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여일을 주살하게 했다. [[적오]] 9년([[246년]]), [[육손]]을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다. 이듬해 가을에허숭(許嵩), 《건강실록(建康實錄)》 세상을 떠났다.

== 계보 ==
선조는 [[춘추 시대]] 진나라의 대부 극의(郤義)의 아들 보양(步楊)으로, 식읍으로 보(步) 땅을 받아 그 지명으로 씨를 삼았다. 그 자손으로 [[공자]]의 제자 보숙(步叔)이 있으며, 그 후예에 진·한 교체기에 공을 세운 장군이 있어 회음후에 봉해졌다. 보즐은 그 후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