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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빛낸위인

흥덕왕

흥덕왕(興德王, ? ~ 836년, 재위: 826년 ~ 836년)은 신라의 제42대 왕이며, 초명은 수종(秀宗), 수승(秀升)이었다가 후에 경휘(景徽)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태자 김인겸(金仁謙), 어머니는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 숙정부인(淑貞夫人, 소성왕에 의해 성목태후으로 추봉)이며, 소성왕, 헌덕왕의 한 동생이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생애

즉위까지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데 가담하여 이찬이 되었고, 819년 2월 현직 상대등 김숭빈(金崇斌)이 사망하여, 후임으로 상대등이 되었고, 822년 1월에는 부군(副君)에 책봉 되었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에게는 김헌장(金憲章), 김장렴(金張廉)등의 왕자가 있었지만, 왕자들 보다 세력이 강하고 조정을 장악하여 부군으로 책봉된것으로 추정된다. 826년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다.

치세

당 문종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지절충녕해군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 検校太尉 使侍節大都督 雞林州諸軍事 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으로 책봉받았고, 구당서  신당서의 신라전에는 태화 5년(831년)이라고 하였지만, 삼국사기는 이 책봉에 대해서는 흥덕왕 2년(827년)으로 하고 있다. 또, 이 책봉 시에, 왕모 박씨를 대비, 왕비 박씨를 왕비에게 책봉하는 일도 아울러 행해졌다. 당나라에 조공을 계속하여 문물의 초래에 노력하고 827년 당나라에 들어간 구 고구려계의 승려 구덕(丘德)은 경전을 가지고 돌아갔다. 또, 828년에 귀국한 김대렴(金大廉)이 가지고 돌아간 차의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한 이후에 영호남을 차의 본 고장으로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827년에 한산주 표천현 사는 어떤 자가 빨리 부자가 되는 방법이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하자 그를 먼 섬으로 추방하였다. 828년 장보고로 하여금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832년 봄 여름에 가뭄이 계속되었고, 정전을 나가지 않고 음식도 줄이며 기우제를 지냈다. 7월 큰 비로 흉작이 되어 굶주린 민중이 도적이 되어 봉기 하였다. 833년 온 나라가 기근에 시달렸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그 다음해 10월에는 각지에 사자를 파견하고 백성들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하사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이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836년 12월에 사망하여, 유언에 따라서 장화부인의 능에 합장 되었다고 하여, 그 왕릉은 경주시 안강읍의 사적 제 30호가 비정 되고 있다. 그리고 흥덕왕 비문에는 신라 태조를 태조 성한왕이라고 하였다.

왕비

흥덕왕이 826년 10월에 즉위 한 후, 12월에는 왕비 장화부인이 죽어, 왕은 몹시 슬퍼했다. 군신은 후비를 넣는 것을 진언 했지만, 왕은 "외짝 새도 제 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무정하게도 금방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라고 하고, 후비를 맞이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또, 후궁의 시녀를 접근하는 일도 하지 않고, 왕의 좌우에는 단지 내시만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를 정목왕후(定穆王后)라고 하였다.

왕비를 잃은 슬픔을 한 쌍의 새에게 비유했던 것에 대해서,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가계

  • 아버지 : 혜충태자 김인겸(惠忠太子 金仁謙)
  • 어머니 :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
    • 왕후 : 정목왕후 김씨(定穆王后 金氏, 장화부인) -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金氏)로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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