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애왕(閔哀王, 817년 ~ 839년, 재위: 838년 ~ 839년)은 신라의 제44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明)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충공(金忠恭, 후에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이고 어머니는 귀보부인(貴寶夫人, 후에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봉)이다.
생애
출생연도
신라의 역사를 저술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민애왕을 비롯하여 하대 신라의 여러 왕들의 출생연도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왕들의 나이를 짐작할 만한 단서가 없으나 민애왕의 경우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에 새겨진 내용을 토대로 출생연도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민애대왕석탑사리호는 863년(경문왕 3년) 경문왕이 민애대왕의 명복을 기원하며 제작하였으며 명문의 내용 중
민애대왕 김명은 선강대왕(宣康大王)의 아들이며 금상(今上 경문왕)의 노구(老舅, 아버지의 외삼촌)이다. 개성(開成) 기미(己未, 839년) 대족월(大簇月, 1월) 23일에 문득 백성을 버리니(돌아가니) 춘추 23세였다. 이미 2기(二紀, 24년)가 지나서 복업을 추숭하려고 동수(桐藪)의 원당(願堂) 앞에 석탑을 새로 세운다. (…) 함통(咸通)4년(863년) 계미 무역월(無射月, 9월) 10일에 기록하다. (이하 중략)
위의 내용에 근거하여 왕위계승전쟁으로 피살 된 민애왕이 23세에 사망하였으며 생년을 817년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민애왕은 경문왕의 할아버지인 희강왕을 자결하게 하고 왕위를 차지하였으니 경문왕은 할아버지의 원수를 위해 석탑사리호를 조성하게 된 셈인데 여기에는 여러 정치적 이유가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여기에는 신라 왕실내에 족내혼으로 인해 복잡한 혼인관계가 형성되는데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로써 즉위하였고, 헌안왕의 어머니인 조명부인과 경문왕의 할머니인 문목왕후는 민애왕과 남매이며 희강왕과 민애왕은 매형과 처남의 관계이다. 경문왕은 신무왕의 외손자 라는 점에서 김헌정과 김균정 파의 왕위계승 다툼의 과정에서 절충과 타협, 화해로 인해 정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결과물이라고 보여진다.
즉위 전
흥덕왕 10년(835년) 2월 김균정이 상대등으로 취임하여 그의 아들 김우징이 시중을 퇴임하면서, 당시 대아찬이었던 김명이 후임 시중이 되었다. 흥덕왕의 사후, 김균정과 김제륭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났고, 아찬 이홍(利弘)과 함께 싸움에 이겨 제륭을 옹립하고, 왕으로 즉위 시켰다. 희강왕의 즉위 후, 837년 1월에 상대등이 되었고, 이홍이 시중이 되어 반대파를 압도하는 입장이 되었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 대사의 장보고 앞으로 집결하고 반격을 모의 하고 있었지만, 838년 1월에 김명은 이홍과 함께 사병을 이용하여 희강왕의 측근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으로 희강왕이 왕궁에서 자살하였고, 김명은 자립하고 왕위에 들었다.
즉위 후
장보고의 아래에서 집결한 김우징등의 일파는 838년 3월에 군사를 일으켜, 김우징파 장수 김양(金陽)이 무주(광주광역시)를 공격했고, 그리고 남원소경을 함락 시켰다. 12월이 되어 김양이 무주 철야현(전라남도나주시)까지 군사를 이동시켰고,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를 보내어 요격 했지만, 김양군의 전투에서 괴멸 했다. 839년 1월 19일, 김양군이 달벌(대구광역시)에까지 진출하였고, 왕은 금군(禁軍)을 이용하여 방어전에 노력했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군사의 반수 이상이 전사했다. 이 패전을 들은 왕의 측근은 모두 도망가 버려, 왕도 또 월유택이라고 하는 별궁에 도망쳐 숨어 있었지만, 김양에 의해 처형당하고,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839년 1월 22일에 사망했다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