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촉,오 썸네일형 리스트형 조운 - 촉의 명장 이름=조운 생애= ? ~ [[229년]] [[11월]] 자(字)= 자룡(子龍) 태어난 곳= 상산군(常山郡) 진정현(眞定縣) 죽은 곳= 낭중 제갈량의 북벌|제1차 북벌]' 이후 [[한중 시|한중]](漢中) 서북쪽의 적애(赤崖)에서 '[잔도] (棧道)' 수리·황무지 개간 작업 수행 이후 '과로사') 조운(趙雲, ? ~ 229년 11월)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중국)|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으로, 자 (이름)|자는 '''자룡'''(子龍)이며 기주(冀州) 상산군 (행정 구역)|상산군]](常山郡) 진정현(眞定縣) 사람이다. === 생애 초반 === 조운은 처음에 원소 (후한)|원소 (袁紹)에게 졸백(卒伯-병졸의 우두머리)으로 임관하였으나, 원소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여 공손찬.. 더보기 맹획 - 촉으로 귀순하다. 맹획(孟獲, ? ~ ?)은 중국 삼국시대의 남만족의 지도자로 남만왕이라 불렸다. 사료에 따라 그 실존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생애== [225년]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할 때, 맹획은 촉한에 굴복한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의 배송지주에 인용된 《한진춘추》의 기록을 보면 제갈량이 남중에 도착했을때 한족과 이민족이 맹획에게 복종한다는 말을 듣고 맹획을 생포해라고 명령을 내렸다. 맹획은 생포되어 제갈량은 맹획에게 물었다. "우리 군이 어떠하오" 말하자 맹획은 "이전에는 허실을 몰라서 패했소. 지금 허락 받고 영진(營陳)을 살펴보니 다만 이정도라면 쉽게 이기겠소"라며 말하였다. 제갈량은 웃으면서 그를 풀어 주면서 싸웠다. 7번을 풀어주고 7번을 사로잡았는데, 제갈량은 맹획을 풀어주려고 했다. 맹획은 떠나지.. 더보기 문추 - 관우에게 문추(文醜, ? ~ 200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다. == 생애 == 문추(文醜) [후한] [건안] 5년([[200년|200]]) 관직 | 기장(騎將)〔원소〕 소속 [원소 (후한)|원소] [원소 (후한)|원소](袁紹)를 섬겼다. [관도 대전]을 앞두고 반전파인 [공융]이 [안량]과 함께 원소의 맹장이라고 했으며, 주전파인 [순욱 (후한)|순욱]은 필부의 용맹일 뿐이라고 했다.진수: 《삼국지》 권10 순욱순유가후전 [건안](建安) 5년([200년]) 2월, [안량](顔良)이 백마(白馬)에서 전사하자 원소는 기병대장으로서 문추를 [유비]와 함께 연진(延津)으로 보내 [조조](曹操)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조조는 [순유](荀攸)의 진언에 따라 수송대를 미끼로 사용해 문추 군을 유인했고, 과연 문.. 더보기 보즐 - 오나라의 정치가 보즐(步騭, ? ~ [247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 [오 (삼국)|동오]의 정치가로, [자 (이름)|자]는 '자산'(子山)이며 서주 임회군 동성현 사람이다. == 사적 == [삼국지] 권52에 열전이 있다. 난세를 피해 강동으로 가, 광릉 사람 [위정](衛旌)과 함께 낮에는 오이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밤에는 공부했다. 살던 곳이 군의 호족 회계 사람 초정강(焦征羌, 《오록》에 따르면, 이름은 초교(焦矯)며, 옛날 정강령이었다)의 땅으로, 그를 두려워하여 [위정]과 같이 오이를 헌상하러 방문했다. 초정강은 보즐 일행을 심히 멸시했으므로 [위정]은 심히 치욕을 느끼고 분노했으나, 보즐은 초정강의 멸시를 묵묵히 받아내었다. [위정]이 보즐에게 분노하자, 보즐은 대답.. 더보기 왕랑-삼국시대 정치가 왕랑(王朗, ? ~ [228년])은 [중국] [후한] 말~삼국시대의 정치가로, 자는 '경흥'(景興)이며 [서주 (중국)|서주](徐州) 동해국(東海國) 담현(淡縣) 사람이다. [방현령](房玄齡), [진서](晉書) 권83 열전제53 본명은 '왕엄'(王嚴)이었다. == 생애 == 처음에는 (에 따르면) 대장군 하진의 속연이 되었다가 서주로 가서 자사(刺史) [도겸](陶謙)을 섬겼으나,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이 높게 평가받아 회계태수(會稽太守)에 임명되었다. 훗날 강동에 [손책](孫策)이 진출하였는데, 주변의 호족들을 규합한 왕랑은 제1표적이 되었다. 군의 공조(功曹) [우번](虞翻)은 달아날 것을 진언하였지만, 한(漢)의 신하로서 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왕랑은 이 주장을 물리쳤다. 처음에는 고릉 땅에서 [손.. 더보기 위속- 안량에게 죽다. '''위속''' (魏續, ? ~ ?) 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다. [[여포]](呂布)를 섬겼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呂布)와 친척 관계가 있는 인물로, 여포는 [[고순 (후한)|고순]](高順)의 병사를 빼앗아 위속에게 주고, 고순에게 위속의 병사를 지휘하게 했다. [[건안]] 3년([[199년]]), [[송헌]](宋憲)과 함께 여포의 모신 [[진궁]](陳宮)을 사로잡고 성을 들어 조조에게 항복하니, 조조는 여포와 진궁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지 않았다. == 삼국지연의에서의 위속 == 여포의 8건장 중 서열 6위며, [[송헌]](宋憲), [[후성]](侯成) 등과 함께 [[여포]](呂布)가 연주를 탈취했을 때부터 종군하는 것으로 나온다. 후.. 더보기 황부인, 황월영 - 제갈량의 부인 황부인(黃夫人, [[186년]]? ~ [[235년]]?)은 [[중국]] [[삼국 시대 (중국)|삼국시대]] [[촉한]]의 재상인 [[제갈량]]의 부인이다. 황씨, 또는 황월영(黃月英), 황완정(黃婉貞)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 이름들은 나중에 사람들이 만든 이름이며, 그녀의 본명은 아니다. 당시는 여성의 이름이 역사서에 남는 일은 드물고, 황부인도 본명이 남아 있지 않다. 즉, 삼국지연의 창작상의 필요로부터 이름이 붙여졌다. 황부인의 부친 [[황승언]]은 당시 [[형주]]의 세력가인 [[유표 (후한)|유표]]와 [[채모]]의 인척이었다. 제갈량이 황부인과 혼인한 이유가 제갈량이 형주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황부인은 제갈량의 뒤에서 많은 조언을 해주어 제갈량에게 많.. 더보기 제갈융 오나라 제갈융 - 오나라 제갈융(諸葛融, ? - 253년)은 중국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군으로, 자는 숙장(叔長)으로 오나라의 유명한 제갈근(諸葛瑾)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놀기를 좋아했고, 학문은 장구(章句)를 주로 했으며, 박학했으나 정밀하지는 못했고, 너그러우며 기예가 많았다. 후에 기도위가 되었고, 진표가 죽자 그 군대를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죽자, 이미 작위가 있는 제갈각(諸葛恪)과 아자비에게 양자로 들어간 제갈교(諸葛喬)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작위를 잇고 병사 업무를 계승하여 공안에 주둔했다. 손권(孫權)이 죽은 후 분위장군으로 옮겼다. 적오 13년(250년), 위나라 장군 왕창(王昶)이 강릉성을 공격하다가 퇴각했다. 평위장군 · 낙향독 주적(朱績)이 제갈융에게 편지를 보내 같이 .. 더보기 이전 1 다음